[빅터앙리] ANDROID
Written by. 玄月
['I-ROBOT ' 21C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인공지능과 인체로봇은 22C를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NW22' 칩의 개발로 인공지능은 3살 어린아이의 지능을 넘어 스스로 성장하여 가장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20대~30대의 절정기를 수십년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NW22'이 개발된지 50년 뒤, 사람처럼 움직일 수있는 로봇'I-ROBOT'이 만들어졌다. 'I-ROBOT'은 21C에 상영된 영화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S.E사가 개발한 인공관절과 고강도 금속으로 만들어진 피부를 가지고 NW사의 NW22시리즈 칩이 내장된 'I-ROBOT'은 걷기, 뛰기, 포옹 등과 같은 인간과 같은 행동이 가능할 수 있게 제작되었으며 NW사와 S.E사의 역사적인 합병으로 N.S사가 설립되고 난 이후 24C, 현재는 N.S사는 인간처럼 성장할 수 있는 로봇, 'ANDROID'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앙리는 읽던 책을 덮었다. 'ROBOT의 개발과 역사'라는 고리타분한 책을 앙리는 빅터의 서재에서 발견한 뒤로 벌써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앙리는 책을 들고 빅터의 서재로 향하였다. 빅터의 서재문을 연 순간 앙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어제 자신이 열심히 치웠지만 방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책부터, 방바닥 여기저기 뒹구는 나사들과 전선들이 여기가 사람사는 방인지, 로봇연구소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조만간 룽게를 불러서 함께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방 안에 들어가 책장에 책을 꽂았다. 책장에는 액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앙리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오만하게 보일정도로 자신만만한 빅터와 달리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제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간 꿈꿔왔던 꿈을 펼치기 위해 N.S사에 입사하였다. 안드로이드 개발팀으로 입사를 하고 일을 하고 있는데 학회에서 빅터를 만나게 되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로봇과 인체의 결합'이란 논문을 쓴 그 앙리 뒤프레가 맞냐고 여러 차례 확인한 빅터는 자신을 이끌고 제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죽은 사람의 모든 기억을 칩에 입력하여 안드로이드로 부활시키겠다는 꿈. 어떤 의미에서는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이 드는 꿈에 그 자리에서 정중히 그와의 공동연구를 거절했지만 그는 회사까지 찾아와 자신과 함께 일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끈질긴 그의 요청에 반쯤 포기해 부탁을 수락했다. 하지만 그 후 그와 함께 일하면서 알게된 사실은 그가 다름아닌 자신이 일하는 N.S사의 후계자이며 NW시리즈의 개발자로 현재 ANDROID개발의 총책임자였다는 것이었다. 이 사진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왠지모를 빅터와의 신분적인 거리감을 느꼈을 때 찍은 것이었다. 앙리는 몸을 돌려 빅터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또다른 액자가 놓여있었다. 그 사진에는 자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는 빅터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찍혀있었다. 빅터와 함께 연구를 하면서 이리저리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스킨쉽에 그만하라고 몇 번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빅터는 투덜거림은 한 귀로 흘려보내기 일쑤였고 자신 역시 이런 애정표현은 처음이어서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기억상으로 이 사진을 찍었을 때가 그런 스킨쉽이 가장 많았던 때였다.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르자 앙리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요즘따라 빅터의 스킨쉽이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스퀸쉽이 한달전이었으니 줄어들었다는 말보다는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는 거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져버렸다. 요즘 일이 많고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앙리는 빅터는 빅터의 방을 나왔다. 그 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리며 하루종일 보고 싶었던 사람이 들어왔다.
"빅터, 다녀왔어?"
"잘있었어, 앙리?"
빅터는 미소를 지으며 앙리에게 다가왔다. 앙리가 그를 안기 위해 팔을 벌렸지만 빅터는 못봤는지 스쳐지나가며 자켓을 벗었다. 앙리는 무안해진 팔을 다시 모으며 자켓을 받아들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어쩌다보니 일찍 퇴근했어."
"그럼 저녁은?"
"저녁은 줄리아랑 먹었어. 너는?"
"나는 오늘 저녁 생각이 없어서."
"다쳤던 사람이 잘먹어야지."
"내일은 꼭 챙겨먹을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앙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빅터는 가볍게 싱긋하고 웃고는 씻는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앙리는 빅터의 자켓과 가방을 정리하고 주방을 둘러보았다. 요즘따라 빅터는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출근하느라 바쁘니까 커피만 한 잔하고 휘리릭 나갔지만 저녁은 일이 있지 않으면 함께 했는데 요즘은 빅터가 항상 밖에서 식사를 해서 주방을 쓸 일도, 같이 마주앉아 식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자신 역시 식사를 거의 안했다. 정확히는 못하겠다고 해야하나. 하루에 죽 한끼하면 많이 먹은 거였다. 입맛이 없는 것도 있지만 그 이상 먹으면 먹은 것을 다 토해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빅터에게 줄만한 것이 뭐 없나하고 냉장고를 뒤적거리는데 벌써 다 씻고 나온 빅터가 앙리의 뒤에서 말했다.
"뭐하는거야, 앙리?"
"자네가 먹을만한 간단한 간식거리가 없나 싶어서."
"간식거리는 무슨, 내가 앤가?"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같이 뭘 먹은 적이 없잖아."
"간식은 됐어. 먹는다면 차라리 이걸 마시지."
빅터는 냉장고 한 켠에 놓인 술을 꺼내들었다. 앙리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벌써부터 술을 마시려고? 그것도 안주도 없이?"
"조금만 마실게. 오늘 숙부님이랑 한바탕해서 좀 마셔야될 것 같아."
빅터는 식탁에 앉아 잔을 꺼내들었다.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빅터의 모습에 앙리는 입안에 가득찬 잔소리를 삼키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빅터가 잔에 가득찬 맑은 액체를 한모금 마신 뒤에야 앙리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또 왜 싸웠나?"
"뭐 뻔하지. 언제 NW사를 제대로 이어받을건지 그걸로 한바탕 했지. 엘렌한테 넘기라고 하니까 엘렌에게는 이미 지분의 반을 넘겨줬으니 나머지 반은 나보고 이어받으라잖아."
"회장님으로써는 당연하지. 조카남매가 같이 회사를 운영하는 걸 보고 싶어하셨잖나."
"내가 잘도 경영을 하겠다. 그냥 엘렌이 NW쪽을, 줄리아가 S.E쪽을 온전히 물려받아서 둘이 같이 운영하면 잘할텐데 왜 나를 끼어넣으려고 하시는지."
"맨날 있는 싸움이잖아. 새삼스럽게 술을 마시면서 풀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자네가 못봐서 그래. 요즘 싸움의 마무리는 뭐 하나가 깨져야한다니까. 예전에 담배를 피우실 때는 재떨이가 날아오더니만 요즘은 금연하신다고 재떨이를 치우셔서 컵을 던지시지 않나. 재떨이잡는게 겨우 익숙해졌는데 요즘은 컵으로 바뀌어서 힘들어. 컵손잡이 때문에 잡기가 힘들단 말이야."
"아직 정정하시니까 그렇게 던지실 수 있는거지. 어떤 의미로 회장님이 아직 건강하시다는 걸 보여주는거 아니겠나."
"농담하지마, 앙리. 요즘 그래서 숙부님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살떨린단 말이야. 진짜 조만간 칼을 던지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빅터의 투덜거림에 앙리는 키득거렸다. 빅터의 숙부이자 N.S사의 총수이신 슈테판 회장은 겉으로는 투덜거리고 망할놈의 조카라고 욕을 하셔도 속으로 빅터와 엘렌 남매를 딸인 줄리아만큼이나 아끼셨다. 빅터 역시 그걸 느끼기에 숙부님이랑 투닥거릴 때에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경향이 있었다. 엘렌이랑 줄리아는 슈테판 회장의 양날개로 현재 활동 중이었다. 엘렌은 대외협력 및 마케팅을, 줄리아는 I-ROBOT의 디자인 쪽으로 일을 하며 슈테판 회장을 돕고 있었다. 빅터는 NW시리즈의 개발자로 슈테판 회장이 총수의 자리를 가장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빅터 본인은 그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있어 툭하면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싸우기 일쑤였다.
"자네이야기 들어보니까 엘렌이랑 줄리아랑 마지막으로 만나고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네. 조만간 두 사람이랑 만날 약속을 한 번 잡아야겠어."
"당분간은 안 돼, 앙리."
"왜?"
"자네가 크게 다치고 퇴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밖에 나갈려고 하나? 그리고 최근에 새로운 로봇시리즈를 개발하게 되면서 두 사람 모두 바뻐. 나중에 내가 약속잡아줄테니까 당분간은 연락하지마, 응?"
"....알았어, 빅터."
빅터 말로는 한 달 전, 밤늦게 퇴근하던 앙리를 차가 보지 못하고 그대로 치고 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너무 크게 다친터라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선고까지 들었고 빅터는 세상을 잃은 듯한 느낌으로 앙리가 일어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 달전, 앙리는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빅터의 집에서 수액을 맞고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상처는 수술로 흉조차 남지 않게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눈을 뜬 앙리를 보자 빅터는 이제서야 일어났냐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사고가 빅터에게는 큰 충격이 되어 앙리는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겉으로 괜찮아보여도 아직 덜 회복되었을 수 있으니 안정기가 될 때까지는 집밖에 나갈 생각도 말라고 말하는 빅터에 앙리는 알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달째 앙리는 외부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긴채 집에만 있었다. 빅터 다음으로 친했던 엘렌과 줄리아, 그리고 룽게를 오랫동안 보지 못해 마음에 걸려했었다. 시무룩한 앙리의 모습에 빅터는 말을 이었다.
"내가 최대한 빨리 약속잡아줄게, 앙리. 너무 섭섭해하지마, 응?"
"안 섭섭해, 빅터.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너무 걱정되서 그런거니까. 이해하지?"
"물론이야, 빅터."
"그럼 이제 들어가서 자자. 내일은 휴일이니까 푹 자자고."
빅터와 앙리는 자리를 정리했다. 빅터는 잘자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고 앙리 역시 제 방 침대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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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이것만 약속해줘.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앙리...."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앙리, 다시 생각해봐."
"어차피 널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행복한 인생도 없었을거야."
"앙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러니..."
"빅터... 너와 함께 새 세상을 상상할 수만 있어도 난 행복해."
"앙리, 제발 사실대로 말해줘, 제발!"
빅터가 울고 있었다.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왜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빅터?
앙리는 찜찜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요즘따라 잠자리가 불편했다. 어젯밤 꿈에도 빅터가 울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매일밤마다 이상한 장면들이 보였다. 빅터의 후배 윌터의 머리를 든 장의사의 모습, 피묻은 플라스크 조각을 들고 있는 빅터, 창살을 사이에 두고 울고 있는 빅터, 그리고 사형대. 끔찍한 악몽들이 매일같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되었다. 그와중에 스토리까지 이어지니 이런 악몽은 또 처음이었다. 이렇게 불쾌한 악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고민하려던 찰나 앙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아무 의미없는 꿈이리라. 단지 컨디션이 안좋아서 그런 것 뿐이야. 앙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을 깰 겸 부엌으로 나가 컵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의 청량감에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빅터의 방문이 열리고 기분이 안좋은지 미간을 찌푸린채 빅터가 나왔다.
"어라, 빅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앙리는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빅터에 앙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빅터는 앙리에게서 물병을 받아내 새 컵을 꺼내 물을 들이키고 대답했다.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엘렌이 안오면 가만 안둔다길래 좀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아침 먹을래? 어제 저녁도 일찍 먹었잖아."
"아침... 뭐, 먹고 가지. 난 회의 자료 좀 챙기고 있을게."
빅터는 몽롱한 상태에서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앙리는 들뜬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빅터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에 평소에는 입도 안대는 빵과 베이컨 등을 꺼냈다. 커피를 내리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듬뿍 넣어 샐러드를 만들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팬에서 노릇하게 구운 베이컨과 계란을 각자 접시에 담아 올리고 냉장고에서 과일잼을 꺼내 올리자 때마침 빵이 토스트에서 툭하고 튀어올라왔다. 오랜만의 빅터와의 식사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앙리는 의자에 앉아 빅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방에서 나온 빅터가 아직 졸린건지 하품을 하며 빅터는 테이블 앞에 앉았고 앙리는 그의 샐러드 접시에 샐러드를 듬뿍 올려주고 입을 열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너무 많이 담는거 아니야?"
"오늘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니까 든든하게 먹어야지."
"이렇게 일찍 가는 거 싫은데..."
"투정부리지 말고."
딱잘라 말하는 앙리의 모습에 빅터는 뚱한 표정으로 샐러드를 먹었다. 테이블 위에는 나이프로 썰고 음식물을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귀한 시간을 이렇게 소비한다는게 앙리는 영 내키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하고 고민하는데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말을 툭 내뱉었다.
"나 어젯밤에 꿈을 꿨어."
"...꿈?"
앙리는 제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주제에서 이걸.... 앙리는 슬쩍 빅터를 보았다. 커피잔을 든 손을 멈추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빅터의 모습에 다른 주제로 빠져나가기는 글렀다는 걸 직감했다.
"그게...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면 꺼내지도 않았겠지. 무슨 꿈인데?"
"그냥 악몽을 좀..."
"악몽?"
"무슨 감옥같은데에 갇혀있었는데 창살을 사이에 두고 자네랑 나랑 손잡고 있었어. 자네는 울고있고 나는 그런 자네를 달래고 있고... 자네는 사실을 말하라고 하고, 난 괜찮다고하는데... 진짜 이상한 꾸...."
챙그랑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테이블 위로 울렸다. 앙리는 깜짝 놀라 말을 멈추었다. 테이블에는 커피잔이 뒹굴았고 안에 들어있던 커피가 쏟아져 있었다.
"빅터, 괜찮아? 커피에 데인거 아니야?"
"괜찮아... 손이 미끄러워져서..."
"데이지는 않았어?"
"테이블에만 쏟았어. 놀라게해서 미안."
빅터는 급히 테이블을 닦아냈고 앙리는 깨진 유리조각을 치웠다. 문득 손에 들린 조각을 보니 깨진 컵은 다름아닌 빅터와 동거하게되면서 처음 산 머그컵이었다. 아까운 마음이 들어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러나 앙리는 그런 마음을 다독이고 입을 열었다.
"여긴 내가 정리할게."
"아니야, 내가 정리할게."
"괜찮아. 자네는 이제 갈 준비해야지."
"그래도..."
"나도 정리하고 잠시 나갔다와야겠군."
순간 빅터의 손이 굳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앙리를 바라보았다.
"나가다니?"
"서점에 가보려고. 새로 나온 신간책 있는지 보고 나간김에 깨진 컵도 사오려고. 집에 있는 책들은 이미 다 읽어서..."
"안돼."
딱잘라서 말하는 빅터의 모습에 앙리는 차근차근 대답했다.
"어디 멀리 가는거 아니잖아, 빅터. 바로 집 앞 서점에만 갔다올게."
"그 서점, 자네가 입원했을 때 없어졌어. 갈려면 시내까지 깊이 들어가야해.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하려고."
"잠깐만 다녀올게. 이렇게 집에만 있어서 제대로 걸어본지 오래란 말이야. 잠깐 나갔다오면서 다리운동도 하고... 운동하면서 회복하면 내 몸도 빨리 나을거 아니야."
"그래도 안돼."
안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빅터의 모습에 앙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크게 다쳤다지만 사람을 나가지도 못하게 막고. 보호하는것도 정도가 있지, 이정도면 과보호였다. 빅터는 원래 티는 안내지만 자신을 싸고 도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고 이후 그 경향이 좀 심해졌다. 앙리는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다. 오랜만에 아침을 함께 보내는데 이런 작은 일로 빅터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책정도야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그만이었다. 집에 있는 유일한 PC는 빅터의 방에 있는 작은 노트북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마저 빅터가 안에 중요한 파일들이 있다면서 작동칩을 가지고 있어 PC를 쓸 수가 없었다. 그에 앙리는 빅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럼 오늘만이라도 자네 노트북 쓸 수 있게 해줘. 인터넷으로 주문할게."
"그것도 안돼."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답답한 마음에 결국 앙리는 언성을 높였다. 언성을 높인 앙리와 달리 빅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보고 싶은 책이 뭔데? 내가 들어오는 길에 사서 올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왜 이렇게 나를 싸고 도는 건가? 내가 아무리 큰 사고를 당했다지만 한달동안 집에 갇혀 살아야될 이유는 없어!"
"갇혀 살다니. 말이 심하잖아, 앙리."
"자네 행동은 어떻고? 엘렌들이랑 연락하지 마라, 집에서 나가지도 마라, 인터넷도 하지 마라. 외부와 단절된 채로 이건 감금이나 다름없잖아!"
"그만해, 앙리."
"내게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거야? 그게 아니면 왜 이러는거야?"
"그만해."
"자네가 독선적인 경향이 있는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내 어디가 불안해서 이러는거야? 정말 내가 다칠까봐 불안한거야, 아님 내가 꿈에서 본 것 처럼 살인이라도 할 것 같아서 불안한...."
"그만해, 앙리 뒤프레!!"
빅터는 고함을 치며 앙리를 노려보았다. 한참 그를 바라보더니 빅터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으며 돌아섰다.
"그만하자, 앙리.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
"빅터, 난 아직 자네의 대답을 듣지 못했어!"
"그만해, 앙리. 날 화나게 만들지 마. 난 이제 나갈 준비해야겠어."
빅터는 날카롭게 대답하며 그대로 뒤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앙리는 다리의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많이 남은 아침식사가 식어가고 있었지만 앙리는 먹고 싶지 않았다. 몰아치는 섭섭한 마음에 앙리는 입술만 깨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걸까. 왜 저렇게 빅터는 자신을 안에 놔두고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은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면 무엇이 두려워 이러는 것일까... 고민하던 앙리는 욕실을 살폈다. 안에서는 샤워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이에 앙리는 빅터의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빅터가 챙겨둔 서류가방이 있었다. 앙리는 서류가방을 뒤적거렸다. 뒤를 연신 확인하며 서류가방을 뒤지던 앙리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앙리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아닌 PC 작동칩이었다. 앙리는 작동칩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빅터가 없어진 걸 알게된다면 필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순간 앙리의 눈에 서재 구석에 있는 시계가 보였다. 책상에 굴러다니는 드라이버로 시계의 뒷편을 뜯어내고 안에 있는 작동칩을 꺼내 빅터의 가방안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과 시계를 원래 있던 자리에 놔두고 급히 방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꺼내 펼쳤다. 책을 펼치자마자 빅터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빅터는 앙리를 물그러미 쳐다보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앙리의 눈은 책을 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빅터의 서재로 쏠렸다. 뭔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지는 않을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빅터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나왔다. 빅터는 현관으로 향하며 앙리에게 말했다.
"갔다올게, 앙리. 그리고 절대 밖으로 나가지마."
"알았어, 빅터."
순순히 대답하는 앙리의 모습에 빅터는 앙리를 바라보았다. 앙리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거짓웃음을 지으려니 입꼬리가 떨리는 것 같았지만 앙리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안 나갈거야, 빅터.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아까전에 소리친 건 미안해, 앙리. 정말 걱정되서 그런거야."
"나도 알아."
"신간책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신간 의학 서적으로 사올까?"
"뭐... 의학이나, AI관련 정보 신간 있으면 사줘."
"알았어. 그럼 갔다올게."
빅터는 앙리에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앙리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 문이 닫히고나서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앙리는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아 축 늘어졌다.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앙리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앙리는 천천히 일어나 빅터의 방으로 향하였다. 서재는 빅터의 서류가방이 없어지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앙리는 PC의 앞에 앉아 작동칩을 넣었다. 전원을 켜고 앙리는 마우스를 잡아 인터넷을 켰다. 너무 오랜만에 잡아서인지 마치 살아서 처음으로 PC를 써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앙리는 가볍게 웃었다. 검색창에 앙리는 더듬더듬 키워드를 쳤다. [VICTOR FRANKENSTEIN]. 빅터의 프로필 밑에 있는 뉴스 기사들을 천천히 훝어보았다. '새로운 NW시리즈의 개발', 'ANDROID의 개발 현황', 'N.S사의 총수자리를 거부하는 후계자', '칩거중인 N.S사의 후계자'.... 다 빅터가 이야기해주었던 것들과 관련된 기사들 뿐이었다. 딱히 크게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외에 [ELLEN FRANKENSTEIN], [JULIA STEPHAN] 등 빅터의 관련 인물들에 대해 쳐보았지만 이렇다할 것들이 없었다. 그 때 앙리는 문득 떠오르는 키워드를 천천히 입력했다. [HENRY DUPRE]. 앙리는 떠오르는 키워드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HENRY DUPRE, 23xx. x. x.~ 23xx. x. x.] 앙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뭔가... 왜 사망일이 입력되어 있는거지... 앙리는 사망일로 적혀진 날짜를 계산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년전이었다. 이에 앙리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1년전에 죽었다고 되어있는 것인가? 앙리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 밑에 있는 뉴스기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앙리는 뉴스 기사들을 보고 떨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앙리는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수많은 뉴스기사 중 하나를 클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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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는 뻐근한 어깨를 주므르며 빌라 안에 들어섰다. 오늘 역시 힘든 하루였다. 아침회의는 역시나 N.S사의 후계 문제에 대한 회의였고 숙부님을 필두로 모두가 그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압박했지만 그는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숙부님은 그게 꽤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엄청난 양의 서류를 주었지만 빅터는 오늘만큼은 그 서류를 나몰라라하고 퇴근해버렸다. 그의 손에는 새로나온 신간들이 가득했다. 앙리에게 아침부터 화를 낸 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이것저것 고르다보니 꽤 많은 양을 책을 고르게 되었다. 빅터는 책들을 받고 미소를 지을 앙리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얼른 앙리에게 선물을 건네주고싶어 빅터는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서며 큰소리로 앙리를 불렀다.
"앙리!"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고 조용한 집안에 빅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이렇게 집안이 조용한거지. 혹시 자나... 빅터는 거실을 보았다. 거실에는 앙리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넋이 나간 듯이 멍하게 앉아있는 앙리의 모습에 빅터는 픽하고 웃었다.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의 앙리는 실로 오랜만이어서 빅터는 그저 웃으며 앙리에게 다가갔다.
"앙리, 다녀왔어."
멍하니 있던 앙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빅터를 바라보았다. 앙리의 얼굴을 보는데 빅터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앙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에 빅터는 가방과 책들을 내려놓고 앙리를 바라보았다.
"앙리, 왜그래? 무슨 일있어?"
앙리는 빅터를 바라보다 그의 셔츠자락을 잡았다. 빅터는 움찔했지만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앙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빅터..."
"왜?"
"난.... 누구야?"
순간 빅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빅터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누구긴... 자네는 내 친구 앙리 뒤프레지."
"거짓말..."
앙리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빅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빅터 프랑켄슈타인. 난 누구야?"
"앙리, 오늘따라 왜 그래? 자네는 내 친구 앙리 뒤...."
"거짓말 하지마!!"
앙리는 빽하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앙리 뒤프레는 죽었잖아... 그것도 1년 전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앙리는 소파 옆에 숨겨두었던 PC를 꺼내 그의 앞에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PC 모니터에는 뉴스 기사들이 떠있었다. '앙리 뒤프레, 연구를 위해 20명 살해.', '살해된 이들 모두 머리가 잘려.', '협회 공식 선언, 앙리 뒤프레 영구 제명.', '앙리 뒤프레 사형 선언' 앙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PC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게 뭐야? 난 여기있는데 앙리 뒤프레는 죽었어. 그것도 20명을 살해한 살인마로 사형선언을 받고 1년 전에 죽었어! 난 뭐야? 난 죽은 앙리 뒤프레의 망령이야? 내 정체가 도대체 뭐냐고!"
빅터는 천천히 떨어진 PC를 들어올려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무감각한 눈으로 기사들을 보던 빅터는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쯧하고 혀를 찼다.
"벌써 세 번째군."
"뭐?"
"네가 이런 질문을 한 횟수이자 널 리셋한 횟수야."
빅터는 PC를 휙하고 던졌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목 뒤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밖으로 나가고나서 나한테 묻더군. 자신은 뭐냐고. 그래서 리셋해버렸어. 두 번째는 앙리 뒤프레의 주변인물들과 연락을 하고나서 자신이 무엇인지 물었어. 그때 역시 리셋해버렸지."
"그게... 그게 무슨..."
앙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빅터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해서 세 번째 앙리 뒤프레. 네가 태어난거야. 근데 이번에는 아예 그런 쓸데 없는 행동이랑 쓸모없는 질문같은거 하지 못하게하려고 아예 메모리칩을 포맷시켜버렸어. 포맷을 했는데도 네가 제일 빨리 물어보는구나. 꿈을 꾸고 너 자신에 대해 스스로 호기심을 가질 줄이야."
말을 끊낸 빅터는 앙리를 쳐다보았다. 빅터와 눈을 맞춘 순간 앙리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평소의 빅터의 눈이 아니었다. 비록 예전처럼은 아니었지만 그는 애정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곤 했지만 지금의 눈은 아니었다. 아무런 애정도 없이 마치 타인을 보는 듯이 매마르고 차가운 눈빛에 앙리는 몸이 덜덜 떨렸다. 빅터는 그런 눈으로 앙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회에서 앙리 뒤프레는 20명이나 살해한 미친 살인마지만 아니야. 그건 잘못된 사실이야. 20명이나 죽인 건 장의사 프란츠놈이었어. 내 연구를 위해서는 죽은지 얼마안된 사람의 시신이 필요했어. 그래서 장의사에게 죽은지 얼마안된 사람의 시신을 가져오면 후하게 쳐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설마 살인을 할줄이야... 내가 제시하는 돈에 눈이 멀어 그자는 사람들을 죽이고 돈을 받았지. 바보같이 난 그 사실을 몰랐는데 마지막 20번째 희생자로 윌터의 머리를 내밀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되었어. 이놈이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내게 돈을 받아냈구나. 나는 그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실험관으로 내려쳐 죽였어. 그 때 옆에 있던 앙리가 날 기절시키고 내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거야. 앙리에게 자수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결국 나대신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어."
끔찍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빅터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저렇게 태연하게 이야기 할 수가 있을까. 앙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지?"
"내가 말했잖아. 이게 '세 번째'라고. 세 번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느낌이 들겠어?"
빅터는 코웃음을 치고 대답했다. 그에 앙리는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빅터는 태연하게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앙리,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궁금했겠지? 요즘따라 왜 스킨쉽을 하지 않는지?"
앙리는 움찔했다.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꿰뚫은 빅터의 질문에 앙리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앙리의 모습에 빅터는 헛웃음을 내며 대답했다.
"넌 진짜가 아니잖아. 진짜도 아닌게 어디서 진짜 앙리 행세를 하고 내게 사랑을 받으려고 들어?"
"그럼..... 그럼 난 뭐야..."
앙리는 빅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랑했던 그의 냉소적인 모습을 도저히 볼 용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빅터는 천천히 앙리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한마디씩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만든 ANDROID. 내가 사랑한 앙리와 나의 연구결과물."
순간 앙리의 머릿속에 쿵하고 뭔가 치는 것만 같았다. 빅터의 멱살을 잡은 앙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가장 알고 싶었던 진실이었지만 더 이상 들었다가는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쉽게 말하면 과부하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휘몰아치듯 다가오는 현실에 앙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빅터는 앙리의 손을 떼내며 대답했다.
"난 앙리가 죽은 후에 그를 되살릴 방법을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이제까지 연구했던 죽은 사람의 모든 기억을 칩에 입력하여 안드로이드로 부활시키는 연구를 시행했지. 강한 전력으로 죽은 앙리의 뇌에 있는 기억을 전력으로 전환시키고 PC로 연결하여 그대로 칩에 넣었어. 그리고 앙리가 미리 만들어놓은 특수 I-ROBOT이자 초기 ANDROID에 삽입했지. 물론 그대로 삽입했다가는 앙리가 자신이 살인마로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기억할 것 같아서 조금 조작했지. 연구실에서 퇴근하다가 큰 사고를 당해 쓰러졌다. 상처는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해서 다 치료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그럼 꽤 그럴듯하잖아. 그렇게해서 네 전 모델들과 네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거지."
말이 끝나자마자 빅터는 앙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앙리가 피할 틈도 없이 빅터의 입술이 앙리의 입술과 맞닿았다. 앙리는 화들짝 놀라 발버둥쳤지만 앙리의 턱을 붙잡은 빅터는 억지로 앙리의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빅터의 혀가 들어왔다. 치열을 훝고 도망치는 혀를 감아올리며 빅터의 키스에 앙리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흘렸다. 창조주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는 첫키스는 씁쓸하면서 달콤했다. 그의 키스에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풀리고 서서히 눈이 감겼다. 앙리는 칩에 저장된 앙리의 기억으로 인해서인지 아님 제 본능에 인해서인지 모를 열망을 느끼며 빅터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달칵.
앙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커졌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빅터는 태연하게 앙리에게서 떨어져 방금전까지 키스하던 입술을 불쾌하단듯이 훔쳤다. 설명을 원하는 앙리의 눈을 바라본 빅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ANDROID를 만들면서 저주받은 사랑이 앙리를 망쳤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앙리를 잃었다는걸 결코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내가 해놓은 장치가 하나 있지. 키스를 하면 리셋버튼이 작동되는 것. 그리고 지금 키스로 네 리셋이 시작된거야."
빅터의 설명에 앙리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렸다. 안드로이드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면 아마 지금 앙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을터였다. 앙리는 너무 놀라고 슬퍼 제대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빅터를 붙들던 한쪽 팔이 덜컹하고 힘을 잃고 떨어졌다. 다가오는 최후에 앙리는 창조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왜......"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없어져야 하는지. 제대로된 질문이 아니었지만 그 속뜻을 간파한 빅터는 앙리와 눈을 맞추고 대답했다.
"앙리가 아닌 안드로이드는 필요없어. 이제 작별이야, 크리처(CREATURE)."
빅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앙리를 본따 만든 부드러운 갈색빛 눈동자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저 초기화모드 안드로이드에 지나지않는 크리처의 육신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모두 잃고 쿵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쳤다. 빅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크리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동안 크리처를 보던 빅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육신을 끌어안았다. 빅터는 크리처를 안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너머로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았다. 그 때 한줄기의 노을이 빅터의 집으로 들어왔다. 붉은 노을색을 머금은 빛방울이 빅터의 볼을 타고 흐르며 반짝였다.
[빅터크리처] CODE NAME 'HENRY DU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