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들판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피던 어느 봄날. 나는 의사 뒤프레 가문의 첫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다정한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세상 그 어느 무엇도 부럽지 않을만큼 행복한 나날을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평화로운 마을에 갑작스럽게 전염병이 닥쳐왔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저명한 의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사람들을 치료하셨지만 환자들은 물론 부모님마저 흙으로 돌아가셨다. 마을의 유일한 의사셨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전염병은 빠른 속도로 마을사람들을 휩쓸었고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나라 전체를 뒤집었던 전염병이 그 기세를 수그리기 시작할 때, 빈민을 구원하던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오셨다. 까마귀만이 울고있는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둘러보던 수녀님 한 분이 집구석에서 숨죽여 울고있던 나를 발견하셨다. 그분들은 며칠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피골이 상접해있지만 마을에서 유일하게 전염병의 마수에서 피해간 나를 거두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고향도 부모님도 모두 잃어버렸다.
[빅터ts앙리]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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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rten by. 玄月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따라온 나는 운좋게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어갔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몸에 손도 못대게 하고 입을 굳게 닫아버린 채 고아원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돌아다니는 내가 귀찮기도 하셨을텐데 그 분들은 나를 사랑으로 감싸안았다. 매일같이 안아주고 보듬어주신 그분들의 정성에 입은 트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고아원 아이들과 조금씩 조금씩 어울려갔다. 어느날 장을 보러가시는 수녀님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친구들 몇 명과 함께 고아원 밖을 나갔다. 작고 소박했던 마을과 달리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시내에 위치한 장터의 모습을 구경하며 수녀님의 치맛단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한 친구가 나를 톡톡 쳤다. 친구는 저기서 마술을 한다며 같이 가자며 소근거렸다. 눈을 반짝이며 조르는 친구의 모습에 나는 결국 치맛단을 놓고 그 아이의 손을 잡아버렸다. 친구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마술사 앞으로 데려갔다. 마술사를 둘러싼 사람들 속을 파고들어 맨앞에 서게된 나와 친구는 아무런 방해없이 마술을 볼 수 있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붉게 입술을 바른 마술사는 카드를 숨겼다가 다른 관객의 옷 속에서 찾아냈고 소매 속에서 장미를, 모자 속에서 비둘기를 꺼냈다. 난생처음본 마술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열심히 박수를 치는데 마술사는 이 쇼의 하이라이트라면서 여자아이를 데려왔다. 마술사는 상자 속에 아이를 넣고 자물쇠로 잠궜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들을 꺼내들더니 거침없이 상자를 찔렀다. 잔인한 마술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고 주변에서 헉하는 소리와 함께 잠잠해졌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는 마술사는 기분나쁘게 씩하고 웃더니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서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고 관객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마술사와 여자아이가 인사하고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내미는 주머니에 동전을 몇푼씩 넣어주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우리를 향해 주머니를 내밀었다. 동전 한 푼없는 우리는 어찌할지 몰라 멀뚱히 여자아이를 보았다. 여자아이는 우리를 훝어보더니 미소를 확 찌푸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돈도 없으면서 마술을 봤냐며 여자아이는 날카롭게 마술사를 불렀다. 마술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왔지만 여자아이의 설명에 급격히 표정이 굳어지면서 이제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들어본 적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욕설에 덜덜 떨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한참 화를 내더니 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씩하고 웃었다. 예쁜아이네? 너, 돈벌이가 꽤 될 것 같아. 그의 눈이 탐욕으로 휩싸인 건 순식간이었고 본능적으로 나는 도망쳐야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도망치려고 뒤돌아선 내 손목이 사내에게 잡혔다. 마치 뱀에게 잡힌 것처럼 내 손목을 휘감는 차가운 그의 손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시장을 울리는 내 비명소리에 주변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았고 어디선가 급하게 수녀님들이 달려오셨다. 수녀장님이 사내의 손을 떼어냈고 다른 수녀님들이 나와 친구를 품에 안으셨다. 수녀님의 품 안에 안기자 그제서야 드는 안도감에 나는 그 품에 펑펑 울었다. 사내는 골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수녀장님께 뭐라 항의를 했지만 수녀장님은 차분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예상치못한 수녀장님의 등장과 마을사람들의 이목에 사내는 나를 노려보다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나 수녀님의 품 안에 안겨있던 난 그 때 똑똑히 보았다. 예쁘장한 애새낀데 아쉽네... 계집아이라면 더 좋았을텐데... 잔혹한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남자로 살아가겠노라고. 그리고 그 날 저녁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말문이 트인 내 손을 꼭 잡고 이름을 물어보셨고 그에 나는 대답했다. '앙리 뒤프레'라고. 그렇게 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앙리에뜨 뒤프레'라는 이름을 버렸다.
몇 년 뒤 나는 다른 아이들과 공부를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빨리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신부님은 내게 성당의 일을 맡기셨다. 성당일을 하면서 가끔 어려운 고급책도 읽고 있는 내 모습에 신부님은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다. 아버지처럼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신부님은 힘든 일도 많고 포기하고픈 날도 많을텐데 이겨낼 수 있겠냐고 하셨다.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신부님은 그 다음날부터 나를 학교에 보내주셨다. 재정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학교에 보내주신 은혜를 갚기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내 성적은 자연스럽게 수석을 차지하였고 특별장학생으로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였지만 기숙사가 있는 학교였기에 나는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날이 가고 계절이 지나면서 나와 동기들은 얼굴에 붙어있던 젖살이 빠지면서 키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로의 모습이 익숙해질 무렵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도 굵어지고 몸에 근육이 붙어가는 동기들과 다르게 팔다리가 가늘고 가슴이 커지는 내 모습에 그제서야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동기의 말이었다. 뒤프레는 갈수록 고와지는 것 같아, 마치 여자처럼... 넌지시 던진 동기의 말에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애써 웃으며 키가 커서 그런가보다며 되도않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날밤 나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었다. 어릴 때는 바지만 입으면 그저 예쁘장한 남자애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런 식이면 필시 조만간 여자란 사실이 들통날 것임이 분명했다. 공포감에 휩싸여있던 내 눈에 띈 것은 다름아닌 하얀 이불보였다. 얇디얇은 이불보를 본 순간 해결책이 떠올랐다. 휴일날 외출증을 얻어 급히 마을로 내려간 나는 곧장 병원으로 향하였다. 붕대를 하나가득 사고 약을 종류별로 사왔다. 그날부터 나는 붕대로 가슴을 꽁꽁 묶고 매끈한 목을 가리기 위해 아무리 더운 날씨여도 카라끝까지 단추를 잠궜다. 가는 목소리를 숨길 방법을 찾지못해 차선책으로 말수를 아끼며 기숙사방을 벗어나는 일을 삼가했다. 갑자기 몸을 사리는 내 모습에 동기들이 가끔 내 방을 찾아왔다. 그럼 미리 사둔 약들을 꺼내보이며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오직 책과 공부만 파고들며 그저 하루하루 들키지 않도록 해달라 기도를 할 뿐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서 산지 몇 년 후 나는 뛰어난 성적으로 추천서를 받고 잉골슈타트대학을 입학했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의과대학을 입학했지만 나의 고민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만 갔다. 완전한 여성의 몸을 지니게 된 나는 사람의 신체구조에 능통한 교수님들 앞에서 단지 가슴만 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결국 시장에서 커다란 흰 천을 사와 팔다리는 물론 몸까지 말아 어떻게든 남자의 신체구조와 비슷해보이려고 했다. 토론과 발표가 주로 이루어지는 수업을 위해 아무도 없는 약제실에 몰래 들어가 실험과 연구를 통해 가느다란 내 목소리를 감출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복용했다. 철저한 준비덕분에 사람들은 나를 앙리 뒤프레로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믿더라도 나 스스로는 절대 주의를 흐트리지 않았다. 쌓아올리는건 어렵지만 무너지는건 한순간이었다. 하루하루 들킬거라는 불안감 속에서 위태롭기 그지 없는 외줄타기를 하며 학교 생활을 하며 논문을 썼다. 내 논문이 발표되자 의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의학계의 이단아라고 부르며 나를 욕하기는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자의 몸으로 대학까지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판국에 욕 좀 들었다고 상처받을만큼 나약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내 꿈을 무사히 이루기만 한다면 누가 뭐라한들 상관없었다. 졸업을 하고난 뒤 몇몇 병원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 중 한 군데에서 내 접합능력을 높게 사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눈물날정도로 기뻤다. 드디어 자유롭게 내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나의 비밀을 숨기느라 가슴 졸이며 살았던 숨막힌 과거들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기쁜 일은 얼마안가 산산조각이 났다. 병원에 일을 나가기 하루 전날, 포탄소리가 전 유럽에 울렸고 내 앞으로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전쟁터에서는 하루하루는 이제껏 겪었던 날들의 몇 십배로 힘들었다. 매일매일 부상병들이 천막에 들이닥쳤고 포탄과 총알이 진지에까지 난무하여 목숨을 부지하는게 기적인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버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건 군대의 특성상 개인활동이 금지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의무실에서 상주하는 의무병인 만큼 내 몸을 감출 수 있는 재료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딜가든 무엇을 하든 동료들과 함께해야한다는 수치인 내 숨통을 조여왔다. 단순히 들키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전쟁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부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이런 곳에서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장 혀깨물고 죽는게 나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내 할일만 했었다. 부상병을 치료하고 기도를 올리는 것. 전쟁이란 큰 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이런거 뿐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내 상관의 심보를 건드렸는지 중위님은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저 아무리 심하게 다차 사람이라도 그들을 치료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내 일이건만 그는 일일이 내가 치료하는 부상병들을 보며 하나하나 핀잔을 늘어놓으며 허튼 짓거리 그만하라고 할 뿐이었다. 그의 무례한 말에 일일이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저 평소처럼 내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내가 치료하던 부상자를 총으로 쐈다. 순간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어 살릴 수 있었는데 왜 죽였냐고 소리쳤다. 그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차갑게 말하며 간첩죄라는 말도 안되는 죄목을 붙이고 내게 총을 겨누었다. 그 총을 보는 순간 허탈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기 위해서 그 고생을 하며 살았을까... 아버지는 소신껏 사람을 치료하다 돌아가셨건만 나는 이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 내 소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 건가....
"앙리 뒤프레!!"
그 때 천막을 펄럭이며 당당한 발걸음에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게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표정처럼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는 내 의견따위는 상관없이 나를 그의 연구실로 데려왔다. 제1사단 연구소를 들어간 순간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현장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군인들이 기괴하게 생긴 기계에 한 시체를 넣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한 찰나 그는 내 앞에 내 논문을 들이밀었다. '자네의 논문, 굉장히 흥미롭더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연구에 대하여 내게 설명했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신께서 행하시는 생명창조를 인간이 행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못미더워하고 이곳을 나가고 싶어하는 날 눈치챘는지 그는 생명창조의 이론을 떠들다가 다른 제안을 해왔다.
'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는가 보군. 그럼 현실적인 이야기 하나 해줄까? 들리는 말로 의하면 자네는 의무실 막사에서 잘 나가지도 않는다며?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그렇다고 의무병으로써 눈에 띄는 전적도 없고. 어차피 그런 최전방에 있어봤어 자네는 조만간 의무실에서 억지로 끌려나가 총알받이가 될거야. 아, 총알받이가 뭐야, 여기를 나가자마자 즉결처분될테지. 여기에서 내 연구를 도와준다면 자네의 죄목을 깨끗이 없어주지. 또, 자네의 프라이버시정도는 지켜줄 요량이 있어. 이정도면 자네의 구미에 충족되리라고 생각하는데?'
날 내려다보며 냉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했지만 그가 제시한 조건은 현재 상황에서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도 않았고 이 전쟁터에서 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원했다. 이곳이라면 사병들이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것이고 무엇보다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면 훨씬 편한 마음으로 내 비밀을 지키지 않을까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기에 남고자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이겠지... 결국 나는 그렇게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앙리?"
순간 나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잘다듬어진 정원이 들어왔고 내 앞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나는 찻잔이 놓여져있었다. 눈앞을 보니 빅터가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오늘 날씨가 좋다고 빅터랑 함께 정원에서 티타임을 보내는 중이었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옛날 생각하고 있었어."
"옛날 생각? 어떤 옛날 생각을 하길래 내가 불러도 몰라?"
"미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나?"
가볍게 웃으며 차를 한모금 들이마셨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둘러쌓여 잠시 옛날 생각을 한다는 것이 꽤 길어졌는지 모양이었다. 나를 보던 빅터는 불쑥 쿠키를 더 가져오겠다며 직접 몸을 일으켰다. 그에 갔다오라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니 이런 관계가 된 것도 우스웠다. 그렇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는 제1사단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를 옮기자마자 빅터는 날 실험실로 끌고 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생명창조라는 허무맹랑한 연구에 반쯤 냉소적이었던 나는 그의 설명에 내 생각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철저하하고 세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론이 정말 현실로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1사단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의 연구에 푹빠져 연구소의 어느 조수들보다 훨씬 열성적인 조수가 되었다.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에는 단순히 접합만 시키던 빅터는 어느새 자신의 연구에 나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와 가까워지면서 보이지 않았던 면들이 보였다. 빅터는 생각보다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신을 믿는 사람치고는 가끔씩 무신론자에 버금가는 발언을 하여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는 했지만 그의 지적 수준은 상당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다보면 내가 몰랐던 새로운 지식들을 알게되었고 내가 몰랐던 지식들에 대하여 물어보면 이것도 모르냐고 독설을 날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한 번은 이런 내가 귀찮지 않냐고 물었지만 모른 상태에서 연구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해주는게 낫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에 나는 처음 접하는 연구를 수월하게 해 나갈 수 있었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성취감에 더욱 연구에 빠져들었다. 또한 그는 의외로 세심한 사람이었다. 거처를 옮기면서 가져온 붕대들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에 연구실에 있는 붕대들을 여러 차례 가져갔었다. 그 많은 붕대를 어디에 쓰냐고 빅터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쓸 데가 있다고만 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그는 어디선가 붕대를 하나가득 가져와 내게 안겨주었다. 머리끈이 낡아져 내 머리카락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 풀려 방해가 되고 있던 찰나 빅터는 어디서 주워왔다며 머리끈를 내게 건냈다. 그 이후에도 조그마한 잔기침이라도 하면 어디선가 약을 구해와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먹으라며 내게 주었고 그의 방에 있는 책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날 밤에 내 방에 그 책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나를 챙겨주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거렸지만 그의 배려에 갈수록 마음이 설렜다. 몰랐던 그의 면모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다보니 내 생활의 절반 이상이 그에 대한 생각 뿐이었고 그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밤마다 기도를 올리며 이런 잡념들이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연구할 때 집중하는 모습, 부드러우면서 나긋한 목소리, 내 손을 감싸는 따뜻한 그의 손. 가끔씩 보이는 그의 미소.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고 그가 나를 향해 웃음지을 때는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밤마다 빅터와 함께 지낸 시간을 되새기면서 행복해하는 내 모습에 나는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노라고 아니, 그를 연모하고 있노라고. 결국 이런 내 마음은 종전 후 자신을 따라 같이 가지 않겠냐는 빅터의 손을 잡게 만들었다. 처음 빅터의 마을에 갔을 때 마을에서 유독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과 그를 향한 적대감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엘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의 성격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또한 나만큼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그 때 나는 결심했다. 그의 곁에서 그의 친우로써 안식처가 되어주겠노라고. 더 많은 건 필요없었다. 그의 곁에 남기만 하면 충분했다. 결심을 하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의 비밀을 그가 알게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순간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와 함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절대 들키지 말아야하는 내 비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잘 숨기면 된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그와 성에서 생활하는데 내 다독임은 일주일도 채가지 않아 깨지게 되었다. 빅터는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한 번은 옷을 사주겠다며 날 옷집으로 끌고가더니 나를 위아래로 훝어보고 큰 옷을 사겠다는 내 고집을 꺾고 결국 옷 중에서 가장 작은 옷을 사주었었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붕대를 많이 쓰는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목소리를 변조하기 위한 약을 만들기 위해 시장에 내려갈려고 하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야겠노라 고집을 부렸고 내 약조제 목록을 훔쳐보고는 성분을 일일이 분석하고는 그런 약을 어디에 쓸려는지 캐물었다. 게다가 심지어 그는 생명창조를 연구하며 의사보다 훨씬 사람의 신체구조에 대하여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가끔 연구를 하다보면 그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소리로 자네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작네라는 둥, 이제까지 본 신체구조 중에서 자네가 제일 작은 것 같다는 둥 말했다. 그 때마다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고 나는 더 이상 그와 어떠한 신체접촉을 할 수 없었다. 눈으로 봐도 저렇게 눈치챈다면 직접 만져본다면 눈치챌 일이 백이면 백이었다. 손에 잡혀있는 찻잔이 덜덜 떨렸다. 그가 내 비밀을 알게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앙리, 쿠키 가져왔어."
뒤에서 들려온 빅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 탁자 밑에 숨겼다. 그는 내 앞에 털썩 앉더니 연구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잡고 조용히 신에게 빌었다. 신이여,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제발... 그에게 제 비밀을 들키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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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일지에 적힌 어제까지의 연구결과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혹시 연구에 어떤 실수가 있지 않았나,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한다면 좀더 효율적인지 검토하기 위해 든 일지였지만 어느 순간 눈은 일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앙리 뒤프레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체를 접합하는 손을 향해 시선이 가있었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앙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 있지만 시체를 접합할 때의 앙리의 눈빛은 누구보다 날카로웠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눈빛이 저런 눈빛이었다. 그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않는 강한 신념으로 가득찬 눈빛. 처음에는 단지 그의 접합술을 이용하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실제로 그를 마주하는 순간 그 눈빛에 순식간에 빠져버렸다.
"빅터, 접합 끝냈어. 한번 봐봐."
첫만남을 회상하던 중 맑은 미성이 들려왔다. 앙리가 벌써 접합을 마치고 수술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체를 살펴보니 역시 팔과 다리가 깔끔하게 접합되어 있었다.
"굳이 볼 필요가 뭐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접합한건데."
"행여 잘못 접합할까봐 날 보던 것 아니었나?"
그의 지적에 흠칫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바라보고 있던 이유는 헛다리 짚었지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걸 앙리가 눈치챈 것 같았다.
"설마. 이제 내 실험접합은 자네 아니면 아무도 못 해."
"거참, 영광이네."
피식하고 가볍게 웃는 앙리의 모습이 너무 고아보여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들이 치말어올랐다. 처음 봤을 때는 필요에 의해서 였다. 그의 접합술을 얻기 위해 즉결처분직전인 앙리를 빼내왔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정이었다. 내 연구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친구이기에 그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깊은 눈빛, 괴짜인 나마저 감싸안는 포근함, 따뜻한 손길까지 모든 것에 의미를 담고 나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는 순간 느꼈다. 이것은 사랑이노라고. 앙리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깨달았을 때 미치는 줄 알았다. 왜 앙리가 내 눈에 띄었는가, 왜 앙리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왜 앙리가 여자가 아닐까... 이런 고민은 꿈자리까지 사납게 만들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서 앙리는 곱디고운 여성의 몸으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를 짐승처럼 탐했다. 앙리의 달콤한 입술을 훔치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핥고 깨물었다. 탐스러운 엉덩이를 끌어당겨 그의 안에 나를 묻고 미친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한껏 높아진 교성과 나를 바라보는 욕정에 젖은 눈빛에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었다. 그날 이후 친우를 향한 내 더러운 욕망이 무서워 앙리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지나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앙리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성에서 머물면서 변변한 옷이 없어 낡아빠진 사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 억지로 그를 옷집으로 끌고 갔었다. 체격에 비해 옷이 흐느적거리는데도 사이즈가 큰 옷을 고르려던 그의 이상한 고집에 억지로 제 사이즈에 맞는 옷을 골라주었다. 군복을 입고 있었을 때와 달리 생각보다 훨씬 왜소한 그의 체격에 살짝 놀랐지만 그저 힘들게 자랐기에 그런 건 줄 알았다. 그 때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후에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었다. 남자치고는 그의 체격은 터무니없이 작았었다. 성별에 따라 작을수 있는 체격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실험을 위해 이런저런 골격을 많이 다루어보았지만 앙리의 골격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 때부터 작게 움을 튼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앙리는 어떤 상황에서 뭘하든 침착하고 차분했지만 유독 몸에 조금만 손이 닿으면 마치 닿지 말아야 하는게 닿은 것마냥 화들짝 놀라 사색이 되곤 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터에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가끔 손이 닿고 몸이 닿아도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는 제 몸에 닿는 것에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으며 귀신이라도 봤냐고 놀렸지만 매번 민감하게 반응하는 앙리의 모습이 이상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했다. 갑자기 왜 저럴까, 내가 닿는게 놀랄정도로 싫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이런 상황이 며칠이나 지속되자 화를 참지 못하고 폭팔했다. 또다시 놀라는 그의 모습에 성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가 그렇게 무섭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에게 따졌다. 더 이상 그에 대한 내 욕망을 참을 수없어 결국 진정하라며 나를 달래는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그를 덥석 껴안았다. 예상대로 앙리는 화들짝 놀라며 몸부림을 쳤지만 한 품에 갇히는 작은 몸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얼마간 몸부림치던 앙리는 포기했는지 힘을 뺐다. 그에 편안한 마음으로 크리바트가 꽁꽁 묶여 있는 목에 코를 파묻었다. 기분좋은 체향이 후각을 자극했고 나는 천천히 그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팔과 허리는 예상보다 훨씬 작았었다. 어떻게 이런 체구가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찰나 퍽소리가 나게 앙리가 나를 밀어냈다. 앙리는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더니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제대로 화가난 앙리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건 그와 같이 지낸지 얼마지나지 않아 알게된 사실이었다. 그가 더 화나기 전에 지금 당장 따라 나가 그를 붙잡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에 남아있는 촉감과 코끝을 맴도는 향에 머릿속이 정지해버렸고 아차하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있었다. 결국 한순간의 유혹에 사로잡혀 해서는 안될 짓을 해버린 나는 몇날 며칠을 앙리에게 빌었고 유혹에 넘어간 댓가는 앙리의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하는 금지령이었다. 그 때 이후 앙리가 눈에 불을 키고 있었지만 한 번 맛본 선악과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리고 직접 만져본 그의 체격과 그의 이상하리만치 민감한 반응은 나의 의심을 키웠다. 가끔 그의 경계가 옅어질 때 슬쩍 그의 몸에 손을 댔었다. 결정적인 건 그가 술기운으로 인해 비틀거렸을 때였다. 내 생일이라는 거짓말을 빌미로 삼아 그에게 술을 권했고 그가 눈치채지 않게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독주를 연거푸마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술에 완전히 취해 통제를 잃은 몸은 혼자서의 힘으로는 절대 방으로 돌아갈 수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러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도 몽롱해진 그를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아 올렸다. 갑자기 허공에 뜨게되면서 살짝 정신을 차린 앙리는 내려달라고 발버둥을 쳤지만 걷지도 못하면서 어찌 돌아갈 셈이었냐고 타박을 주었다. 결국 지쳤는지 앙리는 힘을 빼고 내게 몸을 맡겼다. 예상대로 앙리의 몸은 작은 몸체만큼 가벼웠었다. 예전에 유학시절 몇 번 만나본 여자들도 이정도로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방을 나오면서 나는 확신했다. 앙리에겐 뭔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이 의문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오늘은 마침 룽게도 없었다. 오늘 밤, 나는 앙리의 비밀을 밝혀낼 것이다.
-
개운하게 씻고온 앙리에뜨는 가볍게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방 안을 둘러보던 앙리에뜨는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잠시 내 방에 와 주게. V.F]
짧은 문장이 전부인 쪽지를 내려놓고 앙리에뜨는 서랍장 안에 넣어둔 붕대를 꺼내들었다. 처음에 씻고 난 뒤 이런 쪽지가 놓여있을 때는 얼마나 놀랐을지 빅터는 몰랐을 것이었다. 행여 내가 무슨 흔적이라도 남겨놓았을까 방 안을 살폈고 빅터에게 가는 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밤새도록 연구에 대하여 토론하는 그의 모습에 어느 순간 익숙해진 것인지 이제는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붕대의 매듭을 확인한 뒤 간단한 셔츠를 입고 빅터의 방으로 향하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쪽지를 남겼는지 이리저리 고민힌다보니 어느 새 빅터의 방문 앞에 서있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빅터, 날세. 안에 있나?"
"왔나?"
빅터의 대답 대신 문이 열리고 그가 서있었다. 앙리에뜨가 천천히 방 안에 들어서자 빅터는 문을 닫고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티세트에 앙리에뜨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빅터를 바라보았다.
"빅터, 이게 왠 티세트야? 자네는 밤에 다과를 안먹잖나."
"오늘은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아서 준비했네."
"룽게도 없는데 자네가 이런거 준비할 줄도 알았나?"
"내가 룽게가 없다고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는 아니야. 자, 일단 한 잔 받게."
빅터는 찻잔을 앙리에뜨에게 건넸다. 아무 생각없이 찻잔을 받아든 앙리에뜨는 빅터에게 고맙다고 미소를 지어보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빅터는 그런 앙리에뜨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토론을 위한 다과는 순전히 핑계였다. 이제까지의 증거들을 모두 통합해보면 나오는 결과는 단 하나였다. 그 가설을 참으로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앙리는 몸에 손도 못대게 하고 있으니 남은 방법은 손을 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 방법은 도박에 가까웠다. 만일 가설이 틀린거였다면 앙리가 불같이 화낼 일이었다. 아마 앙리가 성을 떠난다고 선포한다면 그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리스크가 큰 도박이었지만 남은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빅터는 긴장을 감추고 천천히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들었다. 이제까지의 실험과정들부터 시작해서 쓰이는 약품과 접합방법까지 하나하나 집어가며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앙리에뜨는 그 한계와 해결방안에 대하여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안해본 새로운 접합방법과 시체 유지방법에 대하여 빅터의 의견을 물었고 빅터는 그 방법들에 대하여 적용되는 이론들을 다시 계산하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토론에 완전히 푹 빠진 앙리에뜨는 빅터가 내민 수식이 적혀있는 종이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며 중간중간에 비어있는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앙리에뜨가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빅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앙리, 차 한잔 더 줄까?"
"응, 그래 주겠나?"
빅터는 내밀어진 찻잔 가득히 차를 따랐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그녀의 옆에 섰다. 앙리에뜨는 종이를 보다 문득 옆에서 진 그림자에 빅터를 올려다 보았다. 그냥 테이블에 올려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들고 있는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찻잔에 앙리에뜨의 질문은 목너머로 넘어가버렸다.
"자, 여기."
"아, 이렇게까지 가져다줄 필요가 없는데... 고마워, 빅터."
앙리에뜨가 양손으로 찻잔을 잡으려던 순간, 빅터는 손을 놓아버렸다.
"앗!"
"앙리!"
떨어진 찻잔은 앙리에뜨의 셔츠에 찻물을 흘리고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깨졌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앙리에뜨는 행여 화상이라도 입을까 급히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앙리에뜨는 제 셔츠를 잡는 또다른 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앙리, 화상입기 전에 벗어!"
"빅터?!"
당장 벗으라고 으르렁대는 빅터의 행동에 앙리에뜨는 거칠게 빅터의 손을 떼냈다.
"싫어!"
"앙리!"
앙리에뜨는 본능적으로 양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절대 벗으면 안된다... 여기서 벗겨지면 모든 게 끝이야... 공포심이 앙리에뜨의 사고를 정지했다. 단지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이 전부였다. 앙리에뜨가 셔츠를 잡고 버티자 빅터는 앙리에뜨의 팔목을 잡았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빅터의 모습에 앙리에뜨는 완전 사색이 되어 몸을 뒤로 물렸지만 등 뒤에 닿는 쇼파시트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빅터는 이제 오기가 생겼다. 사실 그 찻잔은 약간 미지근한 정도였기에 처음 닿을 때만 뜨겁다고 느낄 뿐이었지 실은 전혀 뜨겁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뜨거우면 행여 화상이라도 입을까 시간을 계산하고 쏟은 것이었다. 그렇게 차라도 흘리면 앙리에게 셔츠를 빌려주겠다는 핑계로 옷을 벗겨볼 생각이었다. 남자라면 그저 웃으며 갈아입겠지만 이렇게 기를 쓰고 막고 있다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였다.
"당장 벗어, 앙리!"
"빅터, 그만 둬!"
"벗어!"
"싫어!"
앙리에뜨는 있는 힘껏 셔츠를 잡고 버텼다. 그러나 이제 작심하고 힘을 쓰기 시작하는 빅터를 이길리 만무 했다. 천천히 가슴을 가리던 팔이 펼쳐지면서 제가 쥐고 있던 옷이 늘어났다. 그리고 빅터는 그 찰나를 놓지지 않고 셔츠를 잡아뜯었다.
"안 돼!!!"
찢어진 셔츠자락과 함께 앙리에뜨의 비명같은 단말마도 하늘하늘 사라졌다. 앙리에뜨는 부들부들 떨며 눈을 감았다. 빅터는 제 앞에 보이는 것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빅터의 눈을 사로잡은 새하얗고 매끄러운 목은 빅터의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정도로 가녀렸다 . 목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니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홀린 듯 그 매듭을 잡자 앙리에뜨는 급히 숨을 들이키고 빅터의 손을 잡아 저지시켰다. 이미 들통났지만 더 이상 빅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빅터는 앙리에뜨의 손을 무시하고 매듭을 풀어 붕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에 앙리에뜨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 다 끝났다. 친우라고 믿었던 이가 알고보니 여자였다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분명 화를 낼 터. 하나뿐인 친구로 받아들이고 우정을 나눴지만 자신을 속였다며 화를 낼테지. 당장 성을 나가라해도 뭐라 할 수가 없지만... 이대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내 앙리에뜨는 포기했다. 나보다 상처받았고 세상을 향해 높디높은 벽을 쌓아온 사람이었는데 유일하게 허락해준 내 존재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나에게서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저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게 둘에게 이득이었다. 앙리에뜨는 빅터를 바라보며 떨어지지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빅터.... 설명할게... 이게, 읍!"
갑자기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빅터의 행동에 앙리에뜨는 눈만 휘둥그레졌다. 이게 어떻게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의 혀를 휘감는 빅터의 농밀한 키스에 앙리에뜨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빅터는 눈 앞에 보이는 여성의 가슴에 자신의 친우 앙리가 사실 여자라는 걸 알게된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앙리 뒤프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꼭꼭 숨겨놓은 이유는 다름아닌 앙리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도덕적인 청년 앙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연모라는걸 알게된다면 실망하고 곁을 떠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숨기고 있었지만 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에 빅터는 제 친우의 허락을 구하는 것도 잊고 그저 제 감정과 본능에 따라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꿈 속에서 맛보았던 입술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에 빅터는 숨을 쉬기 위해 그의 입술을 피하려는 앙리에뜨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키스했다. 앙리에뜨를 품에 안고 벌떡 일어선 빅터는 급히 옆에 있는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나서야 빅터는 입술을 뗐다. 붉어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는 앙리에뜨의 모습을 보던 빅터는 그대로 앙리에뜨의 목에 얼굴을 내렸다. 매끈한 목선을 혀로 핥아올리고 남자라면 아담의 사과가 있어야할 자리를 살짝 깨물어 붉은 키스자국을 남겼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손으로 앙리에뜨의 셔츠자락을 벗겨 침대밑으로 떨어뜨렸다. 등뒤로 서늘한 침대보가 느껴지고 그제서야 상의가 완전히 벗겨졌다는걸 깨달은 앙리에뜨는 화들짝 놀라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빅터는 피식하고 웃더니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앙리, 괜찮아. 겁내지 마."
"빅터... 사실 난..."
"쉬...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 알아."
차분히 앙리에뜨의 말을 멈춘 빅터는 앙리에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빅터의 손길에 긴장으로 뻣뻣했던 몸이 풀렸다. 한결 풀어진 앙리에뜨의 모습에 빅터는 앙리에뜨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마. 난 이제 너없이는 못사니까."
"빅터..."
"여자여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네가 여자여서 다행이야, 앙리."
"어째서?"
의문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앙리에뜨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 빅터는 깊게 웃으며 앙리에뜨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앙리에뜨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널 사랑하고 있어, 앙리."
빅터의 진심어린 고백에 앙리에뜨의 뺨이 붉어졌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빅터에게 들릴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앙리에뜨는 그의 고백에 대답할 수 없었다. 빅터는 앙리에뜨의 뺨과 목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지금 말해. 싫다는 너를 안을만큼 나쁜 놈은 아니니까."
앙리에뜨는 빅터를 바라보았다. 빅터는 애정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 욕망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을 배려하는 빅터의 모습에 앙리에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싫다고 말한다면 필시 여기서 그만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싶지 않았다. 빅터를 밀어내기에는 빅터의 눈빛이, 쓰다듬는 손길이, 안겨있는 품이 너무 따뜻했다. 앙리에뜨는 천천히 빅터의 목에 팔을 걸어 그를 끌어당겼다.
"안아줘, 빅터."
-
"으음....."
아직은 어스름한 새벽, 미약한 새벽햇살이 빅터의 방을 파고들었다. 앙리에뜨는 얕은 신음을 내뱉고 평소의 습관처럼 눈을 떴다. 평소와 다르게 뻑뻑하고 시야가 흐른 눈에 앙리에뜨는 힘겹게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천천히 시야가 환해지는 찰나 앙리에뜨는 제 방 창문이 아닌 눈 앞에 보이는 살빛에 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지....
"흡!!"
앙리에뜨는 급히 비명이 터질뻔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빅터의 가슴이라는 사실에 앙리에뜨는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어젯밤 일들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지그시 제 혀를 깨물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젯밤 처음으로 안기고 정신을 잃었는데 얼마 안 가 눈을 떴는지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빅터는 깨어났냐며 다시 키스하며 안았었다. 그렇게 빅터에게 밤새도록 시달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기절하듯이 잠들었었다. 그러나 안길 때 빅터에게 연신 키스해달라고 안아달라고 조른 제 모습이 기억나 앙리에뜨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미쳤었구나하는 생각뿐이었다. 이 이상 옆에 있다가는 진짜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앙리에뜨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앙리에뜨는 신음을 삼켰다. 쑤시는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 끝으로 간 앙리에뜨는 바닥에 놓여져 있는 제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가려고, 앙리?"
"꺄악!!"
단말마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앙리에뜨는 뒤로 확 끌려왔다. 앙리에뜨는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빅터가 얼굴 하나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어..언제 깬거야, 빅터?"
"자네가 깨어났을 때. 근데 어딜 그렇게 몰래 나가려고 하나?"
"몰래 나가다니. 그런 거 아닐세."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니 어젯밤 일때문에 몰래 나가려고 했겠지, 안그래?"
정곡을 찌르는 빅터의 말에 앙리에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빅터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이 순진한 아가씨, 그런 걸로 날 속일려면 백 년은 있어야 될걸세."
"백 년일지 아니면 일 년일지는 두고봐야지."
"자네 성격에 퍽이나 그렇겠다."
빅터는 천천히 앙리에뜨의 몸을 돌렸다. 천천히 돌리는데에도 허리의 통증에 앙리에뜨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 많이 아픈가?"
"아, 괜찮네. 신경 안써도 돼."
그러나 빅터는 천천히 앙리에뜨의 허리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초야인데도 그렇게 안았으니 허리가 남아날리가 없지. 내가 자제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됐군. 미안하네."
빅터의 사과에 앙리에뜨는 어떻게 대답해야될지 몰라 얼굴을 붉힌채 입술만 달짝였다. 그런 앙리에뜨의 모습에 빅터는 피식하고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맨 정신으로 맞닿는 빅터의 몸에 앙리에뜨의 얼굴은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빨개졌다.
"저... 빅터... 놓고 말하면 안될까?"
"유감이지만 싫네. 내가 이렇게 되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자네는 죽었다 깨도 모르겠지."
빅터는 앙리에뜨를 품에 꼭 껴안고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앙리, 자네 본명이 앙리 뒤프레가 맞는가?"
"아니."
"그럼 진짜 이름이 뭔가?"
"앙리...에뜨... 앙리에뜨 뒤프레."
앙리에뜨라... 앙리에뜨의 이름을 입속에서 몇 번 불러보던 빅터는 앙리에뜨의 이마에 키스하며 웃었다.
"자네에게 잘 어울리는데. 앙리에뜨... 이런 좋은 이름을 이제라도 말하게 되니 다행이군."
빅터는 머리에서 입술로 손을 내렸다. 어젯밤 얼마나 탐했는지 입술이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다. 미약한 열기가 있어 빅터는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맞췄다. 앙리에뜨는 움찔했지만 자신보다는 상대적으로 시원한 빅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맡겼다. 입술에서 목으로 입술을 옮긴 빅터는 제가 만들어놓은 키스마크를 핥으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목소리도 원래 이런가?"
"아....니"
앙리에뜨는 터져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빅터는 가볍게 웃고 그녀의 어깨를 잘근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목소리를 변형한건가?"
"약..."
"약?"
"내가 가끔 시장에서 조제하던 약... 내가 대학생 때 만들었던 약 조제법일세. 목소리를 두껍게 만들어서 남자들이랑 비슷하게 들리게 하려고."
"그 약, 좀 더 손 봐야 되겠던데. 목소리가 미성이어서."
"그나마 이 약이 부작용도 없었으니까. 다른 성분을 넣으면 목소리는 두꺼워지겠지만 부작용을 무시하지 못하겠더군."
"농담일세. 이제 그 약도 다 버려. 자네 진짜 목소리가 듣고 싶어."
빅터는 앙리에뜨의 가슴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앙리에뜨는 부끄러워 살짝 그를 밀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앙리에뜨의 체향을 한껏 맡았다. 그래... 그 때 한순간 맡았던 그 기분좋은 체향이었다. 이 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언제는 반쯤 미쳐서 조향사를 찾아가 향수란 향수를 다 맡아본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향수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이 향 하나를 찾기 위해 마을에 있는 몇 없는 향수집을 다 찾아갔던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비슷한 향조차 하나도 찾지 못해 빈 손으로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원하는만큼 체향에 취한 뒤 빅터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가슴을 보았다. 어젯밤 얼마나 탐했는지 하얀 피부는 붉은 낙인으로 빼곡히 차있었다. 제가 만든 키스마크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던 빅터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덥썩 그녀의 유실을 삼켰다. 화들짝 놀란 앙리에뜨가 그의 어깨를 밀쳤지만 소용없었다. 빅터는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바투 안으며 혀로 그녀의 가슴을 희롱하며 말했다.
"이제 그 붕대따위 하지 마. 바지도 입지 말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자네 모습이 보고 싶어."
"으응...."
앙리에뜨는 애써 신음소리를 삼키고 대답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게 느껴져 빅터는 아쉽게 다음을 기약하고 얼굴을 들었다. 앙리에뜨의 뺨을 쓰다듬으며 빅터는 입을 열었다.
"오늘 당장 마을에 가봐야겠군. 여긴 어머니가 남기신 옷 몇 벌밖에 없어. 그 옷들도 너무 오래된 것들이라 자네가 입기에는 좀 그래."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앙리에뜨. 조만간 엘렌에게도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야지. 아마 무척 반길거야."
"날 싫어하지 않을까? 어떤 이유였든 간에 난 자네 가족들을 모두 속인 꼴인데."
"전혀. 엘렌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걸. 일단 좀있다 룽게오면 마을로 내려가자."
"룽게?!"
"앙리에뜨, 왜 그래?"
앙리에뜨가 화들짝 놀라자 빅터가 의아하게 보았다. 앙리에뜨는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했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룽게한테 보이나? 당장 뒷목 잡고 쓰러질지 몰라."
"아, 그런거라면 상관없어. 문 잠궈놨으니까 아무도 못들어와."
"...언제 잠근거야?"
"어젯밤 자네가 들어왔을 때."
".....날 여기서 내보낼 생각이 없었나보군."
"남자면 자네 몸에 손댔다고 뛰쳐나갔을테고, 여자여도 자네의 비밀이 들켰다고 도망갈게 뻔한데 쉽게 보낼 수야 없지."
주도면밀한 빅터의 말에 앙리에뜨는 입이 벌어졌다. 근데 문득 되새겨보니 뭔가 이상했다. 설마... 이미 알고 있었던건가?
"빅터."
"왜, 앙리에뜨?"
"혹...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나?"
"짐작은 했지."
앙리에뜨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눈치빠른 빅터를 속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20년 넘게 숨겨왔는데다가 심지어 몇 년이나 같이 지낸 대학동기들마저 눈치채지 못했는데 만난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아 짐작할정도라니.... 정말 빅터를 상대로 속일 바에야 귀신을 속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앙리에뜨가 어디서 들켰는지 고민하던 찰나 빅터가 앙리에뜨를 끌어안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빅터는 앙리에뜨의 등을 토닥였다.
"앙리에뜨, 어쩌다 들켰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마. 결과적으론 다 잘되지 않았나."
"그래도..."
"그런 고민일랑 미뤄둬, 앙리에뜨 아가씨. 자, 아직 새벽이야. 어젯밤에 무리해서 피곤할텐데 좀 더 자 둬."
"괜찮은데..."
"괜찮아? 그럼 다시 피곤하게 만들어줄 요량도 있는데."
"아니, 너무 피곤해. 좀 더 자야겠어."
빅터의 눈이 일렁이자 앙리에뜨는 급히 눈을 감고 빅터의 품을 파고 들었다. 빅터는 키득거리더니 앙리에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귓가에 들리는 빅터의 심장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빅터의 심장소리에 맞춰 숨을 쉬던 앙리에뜨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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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이후 당분간 ts쓰지 않을 것 같아요...
연애를 해봐야 연애 소설을 쓰지....(자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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